쿠로코 테츠야가 들고 있던 크로키 북을 내렸다. 하얀 종이 위에는 눈앞의 청년인 것이 분명한 사람의 형상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단상 위에 서서 허공을 보고 있던 청년─미도리마 신타로가 쿠로코의 말에 취하고 있던 포즈를 풀었다. 장시간 같은 자세로 서 있어 어깨가 결리기라도 하는지 그는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며 쿠로코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쿠로코."
"알고 있습니다. 말했던 시간은 넘기지 않았어요."
"조금 정도는 넘겨도 괜찮다는 게야. 너무 딱딱하게 대하진 말았으면 좋겠다만."
그러는 미도리마 군이야 말로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나요. 쿠로코는 그렇게 말하려다, 곧 그만두었다. 그것이 미도리마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인지한 터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쿠로코의 입가로 아주 희미한,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미도리마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아카시를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닙니다. …미도리마 군의 생각을 했어요."
2. 적흑 : 리퀘스트. 아마도 성인 적흑
"테츠야."
몸을 섞다 말고, 아카시 세이쥬로는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쿠로코의 손을 붙잡아 살며시 입가에 대며 연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감정변화가 잘 보이지 않는 평소와 달리 달뜬 얼굴이 아카시 군, 하며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아카시는 다시 한 번 손 끝에 키스했다. 조금 차갑던 손은 이제 완전히 열이 올라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손을 내려놓은 뒤, 다리 사이로 몸을 숙여 신음을 내뱉는 작은 입술 위로 부드러운 입맞춤을 내렸다.
"아까 뭘 하고 싶다고 했었지?"
잔잔한 웃음을 띤 얼굴로, 아카시가 물었다. 그 질문이 끝나자마자 쿠로코의 어깨가 한 번 떨렸다. 화내지 않을 테니 말해줘. 그와 동시에 움직이지 않고 있던 몸이 서서히 움직였다. 테츠야…. 열띤 숨과 함께 아카시는 연인의 이름을 혀 위로 굴려냈다. 부드럽고 자상하게, 하지만 쿠로코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만을 눌러대며, 아카시 세이쥬로는 연인에게 세 번째로 대답을 종용했다.
"아카시 군의 곁을… 떠나고 싶… 흐윽, …!"
단정하던 눈썹이 살풋 찌푸려졌다.
"내가 말했지, 테츠야."
"……."
"테츠야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지만, 내 곁을 떠나지는 말라고."
쿠로코의 얼굴 옆을 짚고 있던 손이 그의 뺨 위를 매섭게 스쳤다. 약한 파열음과 나직한 비명이 같이 울렸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유독 흰 쿠로코의 뺨이 금세 붉게 부어 올랐다.
"감히 떠나겠다고 한 벌이야."
3. 자흑 : 리퀘스트. 파티쉐(를 꿈꾸는) 무라사키바라 + 유아교육과 쿠로코
무라사키바라 아츠시는 고교 졸업 후, 그를 스카웃하는 실업팀이 몇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제안들을 모두 거절했다. 대신 그가 새로이 선택한 진로는 디저트를 만드는 파티쉐였는데, 그것은 평소 과자를 즐겨 먹는 그의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게다가 무라사키바라가 그런 진로를 선택한 것에는 다른 이유 또한 있었다. 남들에게는 말하지 못할, 어쩐지 쑥쓰러운 것이었지만.
"무라사키바라 군. 오늘도 새 디저트입니까?"
그는 언제나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나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동갑내기 청년을 눈에 담았다. 청년은 자신이 들고 있는 종이 가방을 보고 있었다. 무라사키바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가방을 청년의 품에 안겨주다시피 건네주었다.
"쿠로칭이 먹고 싶다 했었으니까, 연습해볼 겸 만든 거구."
"기억하고 있었나요?"
"당연한 걸 묻네, 쿠로칭은. 키세칭도 아니고, 내가 들은 걸 잊어버릴 리가 없잖아. 게다가 쿠로칭 말이구."
그렇게 말하며 무라사키바라는 종이봉투로 손을 뻗어 잘 포장된 봉지 하나를 꺼냈다. 꽃모양으로 예쁘게 짜낸 뒤 굽고, 그 위에 초콜릿을 끼얹은 머랭쿠키 두엇이 봉지에 얌전히 들어 있었다. 쿠로칭, 지금 먹어볼 거지? 무라사키바라가 봉지를 뜯었다. 덕분에 쿠로코는 대답을 할 틈새도 없이, 금세 그의 입 앞으로 내밀어진 쿠키를 얌전히 받아 먹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직접 먹겠다고 했겠지만, 무라사키바라의 행동이 쿠로코의 것보다도 빨랐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