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목데이(9/7) 기념 연성
* 화가 무라사키바라와 평범한 청년 키요시 AU
어느 해변에는 등나무가 집을 휘감듯 자라 봄철마다 연보랏빛 등나무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집이 있다. 또한 마을의 끝자락에 위치한 그 집은 마을의 명소 노릇을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들만 알음알음 구경을 오던 것이, 어느 날엔가 TV의 방송을 한 번 타면서부터는 전국에서 사람이 찾아오는 유명 장소가 되고 말았다.
그 집에는 노부부와 손자 하나가 같이 살았는데, 손자의 부모는 일찍이 사고로 명을 달리 했다고 한다. 게다가 요 근래에는 노부부의 건강도 시시각각 악화되어 가고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노부부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홀로 남을 손자에 대해 이런저런 걱정을 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손자는 어떻게든 괜찮지 않을까요, 하며 그에게 이런저런 걱정을 하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실없이 웃어보였다.
눈이 펑펑 내려 해변을 모두 덮어버린 한겨울에 노부부는 일주일의 간격을 두고 세상을 떴다. 손자는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두 부부의 장례를 치렀다. 시신은 유언에 따라 화장을 했고, 화장 후에 남은 뼛가루는 바다에 고루 뿌려주었다. 그 날에도 함박눈이 바다 위를 뿌옇게 덮어 버릴 듯 내렸다. 손자는 목도리를 둘둘 매고 코트를 껴입은 채 두 개의 유골함에 든 뼛가루를 모두 바닷바람에 흘려보냈다.
모든 일이 끝난 뒤 손자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이었다. 장례로 인해 한동안 받지 않았던 손님을 다시 받기 위해서였다. 본디 그들이 살던 집은 세 사람이 살기에는 꽤나 컸고, 때문에 집의 남는 부분을 작업실로 개조해 필요한 예술가들-주로 화가들이었다-에게 일정 기간 동안 돈을 받고 빌려주고는 했다. 한동안은 그러지 못했지만 말이다.
손자는 작업실을 빌려준다는 광고를 내검과 동시에, 집 앞에 달려있던 문패도 바꾸어 걸었다. 키요시 텟페이(木吉 鉄平). 나무 문패에 홀로 적혀있는 이름이 어쩐지 쓸쓸해보였으나, 그는 그저 만족했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세 사람이 살았던 등나무집에는 이제 한 사람만이 남았다.
광고를 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가올 봄부터 여름이 올 때까지 작업실을 빌리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한창 봄맞이 준비를 하고 있던 키요시는 흙이 잔뜩 묻은 장갑을 벗으며 예약자를 기록하는 노트를 펼쳤다. 네, 듣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 이름을―.
웃는 낯으로 말하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곧 키요시의 얼굴이 오묘하게 변했다. 무라사키바라? 전화기 너머의 상대방이 긍정을 하기라도 했는지 찡그린 듯 찡그리지 않은 듯 미묘하던 눈매가 다시 사람 좋은 웃음을 그려냈다. 오랜만이야. 그래서 예약은…… 봄부터 여름이 오기 전까지? 세 달이지? 펜을 쥔 키요시의 손이 노트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단정한 글씨가 노트 위로 반듯하게 쓰였다.
무라사키바라 아츠시(紫原 敦). 3월 1일~5월 31일. 2층 작업실 대여.
짐은 미리 보내두는 거지? 그 이후로도 키요시는 몇몇 가지를 더 물었다. 최근의 5년, 봄이 되면 매번 보는 사람이다 보니 그가 어떻게 행동할 지에 대해서는 키요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노트 위에 주의해야 할 점 두어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2월의 마지막 날, 무라사키바라가 보낸 것이 분명한 짐이 키요시의 집에 도착했다. 상자 위에는 매직으로 상자에 들어있는 내용물들이 적혀있었다. 옷과, 작업 도구들과, 그 외 필요한 것들. 키요시는 그 모든 것들을 천천히 2층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언젠가 당한 교통사고 덕분에 무릎이 영 좋질 않아서, 하나씩 들고 옮기는 데에도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특히 작업 도구들이 들어있는 박스를 옮길 때에는 더했다.
“키요시―, 있냐!”
그래서 친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을 때, 키요시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박스를 들려던 것을 멈추고 닫힌 현관문을 열었다. 휴가아. 늘어지는 목소리가 안경을 쓴 채 미간을 잔뜩 구긴 친구를 맞이했다.
“마침 잘 왔어. 일단 책은… 여기 옆에 두면 되고.”
“마침, 이라니. 뭐냐, 왠지 불안한데.”
“음, 역시 휴가는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멍청아, 그렇게 뭐 마려운 얼굴로 보는데 눈치 못 채면 바보지!”
키요시는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으며 웃었다. 그 사이 친구―휴가 준페이는 그가 들고 온 새 책들을 키요시가 가리킨 곳에 얌전히 두었다. 그리고는 팔을 둥둥 걷으며 뭐가 필요하느냐 물었다. 값을 톡톡히 받아내겠다는 말은 덤이다.
“저 박스들 옮기는 것 좀 도와줘. 혼자서 하려니 시간이 꽤 걸릴 거 같더라고. 웬만하면 혼자서 해보려고는 했는데.”
“……뭐냐.”
휴가가 내려놓은 책 옆에 쌓인 박스들을 주루룩 훑었다. 가장 위에 있던 박스에 쓰인 이름을 보던 휴가가 표정을 찡그렸다.
“누군지 대충 짐작은 했다만, 역시나네. 그 놈은 네 다리 상태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걸 보내냐? 자기가 직접 들고 와서 옮기면 어디 좀 덧나는 것도 아니고.”
“뭐, 일단은 내가 여기 주인인 셈이잖아? 얼마 전까진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주인은 주인이 할 일을 해야지. 손님한테 시켰다가 나중에 안 찾아오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 난감한 일이니까.”
키요시는 그렇게 말하며 작업도구가 든 박스를 휴가더러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그거 조심해서 다뤄야 돼. 동시에 박스를 들어 올린 휴가에게서 앓는 소리가 한 번 났다. 뭐가 이렇게 무거운 거야?! 꼭 지 같이 무거운 것들만 골라서……. 간신히 박스를 든 휴가가 2층으로 발을 옮겼다. 걸어가는 뒷모습이 한 번인가 두 번 정도 삐끗했지만, 넘어지거나 하는 대형 사고는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았다.
휴가와 키요시가 박스를 모두 옮긴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때다. 시간을 확인하니 마침 점심을 먹을 시간이라, 키요시는 휴가를 거실에 앉혀두고 간단히 먹을 것을 만들어 오겠다며 부엌으로 몸을 들였다.
간단히 만든 점심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밥을 먹던 도중, 휴가가 궁금하다는 듯 문득 물었다.
“걔는 여기가 뭐가 좋아서 온대? 찾아보니 유명한 놈이더만.”
“글쎄……, 꽃이 예뻐서 아닐까. 직접 물어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는데. 이참에 오면 물어보지, 뭐.”
“어어, 내가 물어봤다는 건 말하지 말고.”
키요시가 밥을 우물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즈키는 이따 오후에 온다더라. 마지막의 밥을 입에 밀어 넣은 휴가가 말을 덧붙였다. 오후에 한 트럭 싣고 온다던데. 말을 끝맺은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밥그릇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 이후 휴가는 자신도 할 일이 있다며 가보겠다 했다. 도와준 값은 안 받아가도 돼? 현관에 서서 키요시가 묻자 멍청한 듯 보는 시선이 돌아왔다. 점심 준 건 생각도 안 하냐.
“나중에 과일이나 좀 줘. 이즈키 자식은 나한텐 꼭 비싸게 팔아먹으려 그래서.”
“그걸로 돼? 그러면 좀 빼두고.”
“오냐. 나 간다.”
다시 홀로 남겨진 집에서 키요시는 휴가가 가져다 준 책을 정리하기 위해 책을 묶은 끈을 칼로 잘라냈다. 홀로 시간을 보낼 때 심심할까 싶어 이것저것 주문해둔 것이다. 그 중에는 간간히 휴가의 취향인 게 훤히 보이는 책도 섞여있었지만, 썩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이내 현관에 쌓여 있던 책들은 모두 1층 키요시의 방 한 쪽에 있는 책장에 나란히 꽂혔다.
이즈키는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찾아왔다. 이래저래 일이 있어서 오려고 했던 시간보다 찾아오는 게 늦었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이즈키에게 키요시는 손을 내저었다. 그런 날도 있는 법이지. 넌 진짜 좋은 놈이야, 알아? 결국 사과 대신 딸기를 한 아름 더 안겨준 이즈키가 킥킥댔다.
“저녁은?”
“어…, 오늘은 집에 가서 먹을까 하고.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모였다더라.”
“그래? 어쩔 수 없지. 과일 잘 먹을게, 나중에 또 보자.”
상하지 않게 보관 잘 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이즈키 또한 키요시의 집을 떠났다. 조금이나마 시끌시끌했던 집안이 순식간에 적막으로 가득 찼다. 오늘 저녁은 혼자네. 현관에서 몸을 빙글 돌린 키요시는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며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갔다.
조부모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 하고도 이십일이 지났다. 조금 있으면 두 달이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혼자서 밥을 먹는 것은 어색하다. 정말로 간단하게 차린 저녁 밥상을 앞에 두고, 키요시는 잘 먹겠다는 인사를 습관처럼 입에 올렸다. 들어주는 이가 없어 답할 이도 없었다. 식기들이 저들끼리 부딪혀 달그락댔다.
그래도 내일부터는 좀… 괜찮겠지.
내일은 무라사키바라가 오는 날이다.
* * *
무라사키바라는 키요시의 집으로 오면 작업실의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바다를 항상 제일 먼저 그렸다.
첫 번째로 찾아왔을 때에는 그냥 그림을 그리네, 하는 정도로만 넘어갔었고, 두 번째 해도 첫 번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 번째 해에는 이번에도 그리네, 하고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다 네 번째 해, 즉 작년이 되고 나서야 키요시는 무라사키바라가 이 작업실에서 가장 처음 그리는 그림이 언제나 바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히 알아차린 시점에서 이유를 물었지만, 무라사키바라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뭐였을까. 키요시는 무라사키바라가 다섯 번째로 그린 바다 그림을 보며 고개를 아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하나 없는데.
“……뭐 하고 있어? 키요시.”
그 사이 작업실의 주인이 돌아왔다. 바다 그림을 보고 있었어. 딱히 거짓말을 하거나 변명을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사실 그대로를 말했다.
“키요시 보라고 그린 거 아닌데.”
“그러면?”
“……키요시가 알 거 없구.”
무라사키바라가 입술을 반쯤 삐죽대며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말하기 곤란한 종류인가?
“불편한 거면 굳이 말 안해도 돼.”
“…….”
그러자 시선이 대놓고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진짜 나랑 말하기 싫은 건가. 잠시 고민하던 키요시는 그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그가 이 작업실에 찾아온 본래 목적을 입에 올렸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저녁은 먹을 건가 싶어서. 그래야 준비할 때 편하니까. 늦게 먹을 거면 따로 준비해줄게.”
하지만 눈을 도르륵 굴리던 무라사키바라는 키요시가 원하는 대답 대신 전혀 딴 소리를 했다. 키요시, 키요시네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그 딴 소리가 이런 류의 이야기일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그래서 키요시는 잠시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만 세 번 깜박였다.
“겨울에 두 분 다 돌아가셨어.”
“……흐응, 그랬어?”
“장례도 치렀고. 아까 들어올 때 문패 못 봤어? 이제 내 이름만 있는데.”
“아―, 보긴 했구.”
그럼 왜 물은 거야? 그런 질문이 목 끝까지 올라왔으나 키요시는 그것을 다시 꾹 밀어 넣었다. 한참 말이 없던 무라사키바라가 제 그림 쪽으로 몸을 돌려 세우며 선고하듯 말을 툭 던졌다.
“그럼 키요시, 앞으로 저녁은 여덟시에 나랑 먹는 걸로 해. 아침은 일곱시 반이 좋구, 점심은 한시가 좋아.”
“어, 음. 무라사키바라, 꼬박꼬박 먹게?”
“식비 때문이면 더 줄 테니까 불만은 안 들을 거야. 키요시가 혼자 먹는 거 싫어한다고 해서 같이 먹어주는 건데 싫으면 관두구.”
……. 기이한 일이다. 저런 말을 무라사키바라에게 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꽤 예전 일이다. 적어도 작년, 혹은 재작년.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덕분에 무라사키바라에게 알겠다고 대답을 해주는 게 퍽 늦어버렸다.
처음 몇 날 정도만 시간을 꼬박꼬박 지킬 것이라는 키요시의 예상과는 달리, 무라사키바라는 비교적 성실하게 식사 시간을 지켰다. 메뉴의 투정이나 간식을 달라는 투정을 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야 조금은 들어주거나 혹은 가볍게 넘기면 되는 문제다.
무라사키바라와 키요시의 하루는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다르다. 일어나는 시간과 식사 시간, 그리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두 사람의 하루가 겹칠 일이 거의 없었던 탓이다. 식사 시간에라도 볼 수 있으니 안심이지. 어쨌거나 무라사키바라는 그 자신의 집에 손님 자격으로 찾아 온 사람이었으므로, 키요시는 그의 생활에 대해 간섭을 할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키요시의 생활에 간섭아닌 간섭을 하는 건 무라사키바라 쪽이었다. 그들이 지내고 있는 집 주변으로 등나무 꽃이 하나 둘 피기 시작했을 때부터, 무라사키바라는 작업실에 키요시를 꽤나 자주 부르기 시작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옆에 두고 싶어서 부른 거니까 아무거나 하구. 캔버스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무라사키바라가 말했다.
그 이후, 무라사키바라의 작업실 한 쪽에는 작은 탁자와 함께 책 몇 권이 놓여있게 되었다. 키요시는 그 곳에서 주로 책을 읽었다. 그러다 가끔 무라사키바라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고, 때로는 멋있다는 평을 해주기도 했다. 평온한 일상이었다.
“키요시.”
열린 창문 너머에서부터 등나무 꽃의 향이 봄바람을 타고 살금살금 들어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을 마주 앉아 저녁을 먹고 있던 두 사람 중, 무라사키바라가 맞은편의 상대방을 불렀다. 불린 당사자는 막 국을 마시려던 참이라, 손에 든 국그릇을 엉성하게 내리곤 무라사키바라 쪽으로 눈을 옮겼다.
“나 가면 찾아올 사람은 있구?”
“아마 있겠지? 오늘만 해도 작업실 언제부터 비냐는 전화도 왔었고.”
“그럼 그 때는 그 사람이랑 같이 먹겠네.”
“어… 꼭 그렇진 않을걸. 사람따라 다 다르니까, 따로 먹을 수도 있지.”
“…….”
무라사키바라가 또 불만이라는 듯 입술을 쭉 내밀었다. 설마 이 시점에서 과자를 찾는 건 아니겠지. 당사자가 알게 되면 아니라며 소리를 빽 지를 생각을 하며, 그는 무라사키바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연히 식사를 하던 손은 멈췄다.
무언가 못마땅한 얼굴로 제법 한참을 고민하던 무라사키바라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계속 작업실 빌리면 다른 사람은 안 오지?”
“네가 빌린 거니까, 당연히.”
“그럼 내가 계속 빌릴래.”
키요시는 다시 한 번 되물었으나, 돌아오는 말은 같았다. 게다가 자길 돈 없는 사람으로 보냐는 짜증도 함께 오는 바람에, 그는 밥을 먹다 말고 그의 손님을 달래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궁금한게 있어. 무라사키바라.”
올해의 마지막 날까지 작업실을 빌리겠다는 구두 계약을 마친 뒤, 키요시가 물었다. 무라사키바라가 찾아오기 전 휴가가 자신에게 했던 질문이었다.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한 번 해 보는 거다. 후식으로 키요시가 준 흑사탕을 하나 물고 있던 무라사키바라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왜 여기로 작업하러 오는 거야?”
바보 같다느니, 하는 말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무라사키바라는 그저 키요시를 응시했다. ……내가 뭐 못 할 질문 했나?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몰라서 묻는 거야?”
“보통 질문을 하는 건 모르는 걸 알고 싶을 때니까.”
“다시 말 안 할 거니까 귀 열고 제대로 듣구.”
“……?”
“키요시 보려고 오는데.”
대꾸할 말도 생각나지 않아 입을 다문 채로 멍하게 있는 키요시를 향해 무라사키바라의 말이 재차 이어졌다.
“바다 왜 그리는 거냐고 물었지. 처음에는 그냥 그린 거였는데, 그거 말고는 전부 키요시 때문에 그린 거구. 키요시랑 닮아서.”
그러니까…….
갑작스럽게 알게 된 사실에 키요시는 반쯤 당황한 눈으로 무라사키바라를 보았다. 그는 이제 입에서 반쯤 녹은 흑사탕을 와작대며 깨물어 먹고 있었다.
덧붙임
연성을 쓰던 도중 상편과 하편으로 나뉘게 될까봐 조마조마했습니다만…… 간신히 나누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자고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면 후일담이 여기에 수정되어서 붙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해피 자목데이. 무라사키바라랑 키요시는 얼른 연애하는 것이 옳다 ㅇㅅㅇ/
그리고 후일담
1. 여름이 되면 뉴 이벤트 CG를 얻을 수 있다
여름이 되자 바다 근처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작업실을 포함한 등나무집에는 짠내를 품은 더운 바람이 매일같이 불어 들어왔다. 이 집엔 에어컨이라는 게 없어? 찌는 듯한 더위에 불만을 품은 무라사키바라가 부채질을 하다 말고 집 주인에게 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조금 전 키요시가 만들어 내온 수박화채가 놓여 있었다. 무라사키바라는 그 몫으로 주어진 그릇에 화채를 조금 더 담았다. 화채에 섞인 얼음이 쨍한 소리를 냈다.
키요시는 햇빛을 피해 몸을 뒤로 젖혔다. 그 역시 더운 건 마찬가지라, 손 부채질을 팔랑팔랑 하던 참이었다. 에어컨이라. 뒤늦은 대답이 더위를 먹고 마루에 길게 늘어졌다.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계실 때는 두 분이 추위를 많이 타셨으니까, 살 생각을 못했다고 해야 하려나……. 그래도 작년엔 이렇게까지 덥진 않았던 거 같은데.”
“난 작년 여름에도 엄청 더웠어.”
“그건 네가 사는 데가 유달리 더 더웠던 거 아닐까?”
잠시 생각해보던 무라사키바라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더 더워. 대체 어떻게 버틴 건지 모르겠구.”
“선풍기를 끼고 살았지. 그래도 그거 있으면 나름대로……,”
줄줄 말하던 키요시가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선풍기가 있으면 된다, 고 말하려 했는데, 애석하게도 집에 있는 단 하나의 선풍기는 어제를 기해 완전히 망가져버렸던 것이다. 선풍기가 없네. 이마를 짚은 채로 끙, 앓는 소리를 내던 키요시의 위로, 무라사키바라의 그림자가 반쯤 드리웠다.
그런데, 익숙하게 보여야 할 것이 없다. 무라사키바라는 머리가 꽤 길지 않았던가? 그럼 당연히 머리카락이……. 배회하던 눈이 무라사키바라의 목덜미 너머에 뚝 멈췄다. 대강 묶은 듯한 보라색 꽁지가 하나.
“…머리 묶었어?”
“더우니까 어쩔 수 없잖아. 이렇게라도 안 하면 더위에 죽어버릴 테니까.”
“사람은 그 정도 더위로는 안 죽어.”
“죽을 수도 있어. 열사병 얘기 못 들었구?”
그건 어르신 분들 이야기……지만, 키요시는 더 반박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말하다간 끝이 나지 않으리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무라사키바라는 키요시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어컨 없이 버티는 건 이번주가 한계라고 했다. 다음주까지 에어컨을 사지 않으면 어떤 일을 할지 모른다는 협박도 덧붙였다.
집이라도 부술 생각이야? 그러자 무라사키바라는 집에 여분의 과자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와 비슷하게 진지한 얼굴로 그럴지도 모르겠다며 끄덕였다.
“알겠어, 조만간 하나 살게. 일단 작업실에만 사두면 되는 거지?”
“……나보고 1층에 내려오지도 말란 소리야?”
“보통 작업실에 있잖아. 아니면 1층에?”
“그냥 둘 다 산다는 선택지는 없어? 키요시 이럴 때보면 진짜 노친네같아.”
“음. 한 번에 많이 지출하는 건 안 내키니까. 하나만 사도 충분해.”
그리고 지금 그 모습, 나름대로 마음에 들기도 하고.
그것에 이번에는 무라사키바라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
2. 저세상 저녁상을 맞이하기 5분 전
“키요시, 쟤네는 왜 있어?”
무라사키바라가 식탁에 앉은 휴가 준페이와 이즈키 슌을 보며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저 불청객들은 이전에도 몇 번인가 얼굴을 본 기억이 있긴 했지만,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보다 정확하게 짚자면 이름을 기억하기 싫었다는 게 더 맞을 테지만.
“어쩌다보니 약속이 잡혔지 뭐야.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해, 무라사키바라. 집 앞에서 만난 거거든.”
“여기까지 찾아올 일이 대체 뭐가 있구?”
“책이랑 과일. 너도 휴가랑 이즈키네 가게에 몇 번 가지 않았어?”
무라사키바라가 영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가긴 했지만 못 봤어.”
“있었는데 네가 못 본 척 한 거다, 이 자식아!”
듣다 못한 휴가가 끼어들었다. 친구 집에 친구가 밥 먹으러 오겠다는데 뭐 잘못된 거 있냐? 엉? 듣기만 해도 짜증이 팍팍 묻어나는 목소리에 옆에 앉아있던 이즈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좀 참으라고 했는데.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먹으러 와? 방해야.”
“몰라서 묻는 거냐? 네놈이 이 때 아니면 안 먹는다고 키요시가 구구절절 해명까지 늘어놨다고!”
해명은 아니고 이러이러했다, 정도의 양해였지만, 이미 뱉은 말을 되돌릴 수는 없다. 잔뜩 성을 낸 덕분에 콧잔등을 타고 내려온 안경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휴가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해명을 왜―,”
“무라사키바라.”
“응.”
키요시 쪽으로 순순히 돌아서는 무라사키바라를 보던 이즈키는 왜인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냥 다음에 같이 먹으면 안 될까, 키요시! 그렇게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고, 그는 키요시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어느새 휴가는 다시 자리에 앉아 저 녀석은 역시 마음에 안 든다며 꿍얼대고 있었다.
“기왕 온 거, 오늘은 같이 먹으면 안 될까? 다음엔 먼저 물어볼 테니까.”
“……과자도 사줘.”
“…한 박스?”
“두 박스.”
일련의 협상이 끝나고, 저녁을 하러 간 키요시를 제외한 세 사람이 식탁을 둘러싸고 앉았다. 당연하게도 말은 없었다. 이즈키가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회심의 다쟈레도 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휴가의 구박과 무라사키바라의 무시 뿐이었다.
나 그냥 집에 가고 싶어…….
이즈키는 그렇게 되뇌이며 키요시가 조금이라도 빨리 저녁을 준비해 식탁으로 오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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