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슬링거걸 AU
* 일전에 썼던 건슬링거걸 AU(황립, 자목1, 자목2)와 설정을 공유합니다.
* 의체에 대한 설정이 원작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키요시 텟페이는 잘 시간이 되면 항상 안대를 찾았다. 그의 안대는 검은색으로, 그가 안대를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색이 바뀌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오늘도 그는 침대 옆에 얌전히 놓인 안대를 집어 눈 위에 반쯤 씌웠다. 안대에서는 아주 옅은 체취가 났다. 잘 때에는 항상 하고 있는 것이니 체취가 배어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그것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돌아가자마자 다른 옷들과 함께 세탁기에 넣고 빨아버려야겠다. 그는 그리 생각하며 방 한 쪽의 작은 탁자에 놓인 약통을 집어 손바닥 위로 톡톡 털어냈다.
“……다 먹었나?”
두 알이 나와야 하는데, 한 알 밖에 없다. 키요시는 텅 빈 약통 안을 요모조모 살펴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손 위의 약만을 한 입에 넣고 물과 같이 삼켜버렸다. 혹시 몰라 여분으로 챙겨온 것도 얼마 되지는 않을 텐데. 하루라도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나. 그는 컵을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고, 휘적휘적 걸어 그때껏 켜져 있던 침실의 불을 끄고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안대를 내려 눈 위를 모두 덮어버리자, 창문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던 바깥의 불빛도 모두 사라졌다. 어설피 뜨고 있던 눈을 감았다. 시각이 이중으로 차단되었다. 길게 내쉰 숨이 이불 위로 곱게 가라앉았다. 내일의 일정은 어떻게 되더라…….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가는 것으로 하자. 그것을 끝으로 키요시는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잠에 빠져들었다.
* * *
의체는 담당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담당관에 대해 썩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무라사키바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오늘 아침에 눈을 뜬 이후로 처음 보는 그의 담당관을 보며 눈 밑이 시커멓다는 인사를 건넸다. 상냥함과 걱정이 담겼다기보다는 비아냥거림이 섞여있는 말이었으나 담당관은 그저 피곤하다는 말로 의체에게 대답했다.
일찍 잤으면서 왜 졸리구. 식빵 한 조각을 벌써 해치운 무라사키바라가 물었다. 꿈자리가 좀 사나웠어. 키요시 또한 식빵이 담긴 봉지로 손을 뻗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런 일이 드문 것도 아니고. 오히려 무라사키바라라면 상당히 자주 보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째서인지 의체 쪽에서 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평소보다도 더 가시 돋친 것들뿐이다.
키요시는 바짝 마른 입에 식빵 하나를 더 물었다. 입맛이 없어 무언가를 먹고 싶진 않았지만, 먹어야 오늘 일을 무사히 끝낼 수 있다. 기운이 없어 의체의 짐이 되는 것은 사절이었고, 무라사키바라도 원하지 않을 터다. 그래서 그는 반쯤은 억지로 뱃속에 음식을 욱여넣었다.
“저번에도 피곤한 거 때문에 나 다치게 했었구. 오늘도 그럴 생각인 거야?”
“설마…, 난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어. 저번의 일은, 그 때도 말했지만 내 판단 미스에서 벌어진 거기도 했고. 그런 일은 안 일어나게 할 테니까 안심해도 돼.”
“그걸 어떻게 믿어? 나 아직도 키요시 못 믿겠는데.”
무라사키바라는 부루퉁한 얼굴로 네 장 째의 식빵을 우물댔다. 딸기잼을 가득 바른 식빵이었다. 불평을 하면서도 잼을 바를 시간이 있었나. 이야기의 흐름에 맞지 않는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키요시. 의체가 그를 불렀다. 키요시는 눈을 한 번 깜박이고 방금 전 그가 들은 말에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괜찮아. 준비도 완벽하고, 피곤한 것쯤은 참고 버틸 수 있어.”
수긍하는 눈치는 아니었으나 의체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그럼 슬슬 나갈 준비라도 할까! 축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기라도 하려는 양 키요시 텟페이가 부러 밝게 외쳤다. 곧 무라사키바라가 들어간 욕실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키요시는 무라사키바라가 욕실에서 씻을 동안 그들이 챙겨왔던 짐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무라사키바라가 쓸 총기가 담긴 가방은 반대편에 따로 놓아두고, 그들이 숙소에 이틀 간 머물 동안 입었던 옷들을 모두 캐리어에 대강 개켜 넣었다. 어차피 돌아가면 모두 세탁기에 들어갈 예정이니 옷이 구겨지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씻고 나온 무라사키바라의 품에 무기가 든 가방을 안겨주었다. 무라사키바라는 그와 가방을 한 번 번갈아 본 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가방의 내용물을 하나 둘 꺼냈다. 준비할 동안 무기 손질이라도 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뜻을 용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키요시는 여직 젖은 무라사키바라의 머리를 말려줄까 하다, 이내 그만두고 성큼성큼 걸어 욕실로 몸을 들였다.
키요시와 무라사키바라가 식탁을 사이에 두고 앉은 것은 사십분이 지난 뒤였다. 그 사이 무라사키바라의 머리는 온전히는 아니라도 거의 다 말라있었고, 키요시는 복장까지 멀끔하게 갖춰 입었다. 식탁 위에는 컬러로 인쇄 된 지도가 한 장 펼쳐져 있다. 그리고 붉은 마커로 표시된 곳은 총 두 곳이다. 키요시는 그 중 한 쪽으로 손을 뻗었다.
“저 쪽은 카사마츠 씨와 키세가 맡을 거다. 아직 연락할 시간은 안 됐기도 하고, 저 쪽은 저 쪽, 우리는 우리대로 단독 행동이니까 여기에만 충실하면 돼.”
“그냥 가서 다 죽여 버리면 되는 거야?”
“그래, 특별히 잡아오라고 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무라사키바라에게 그렇게 섬세한 종류의 일은 오지 않는다. 반드시 살려서 잡아가야 하는 타깃을 무라사키바라가 죽여 버린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무라사키바라는 힘 조절에 실패했다는 둥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 말을 들은 이후, 혹시 의체의 조정을 통해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기술관인 이즈키에게 데려가 원인 파악을 부탁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기술적인 이유 대신 무라사키바라의 본능이 원인이라는 추상적인 이유를 키요시에게 되돌려주었다. 조건강화를 해도, 남은 게 있잖아.
무라사키바라는 키요시가 침묵하고 있을 동안, 눈을 굴려 무언가 먹을 것은 없는지 찾았다. 분명 이곳에 올 때 두 개의 봉지에 가득 담아 가져왔던 것 같은데 쥐꼬리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어제 조금 남겨뒀는데에. 중얼거리는 목소리의 끝이 길게 늘어졌다.
“키요시―. 과자 없어?”
“어제 식탁 근처에 있는 건 봤는데… 다 먹은 거 아냐?”
“안 먹고 남겨둔 게 있었어……. 키요시가 먹은 거 아니구?”
“내가 그럴 리가―, 아, 잠깐. 카사마츠 씨 전화다.”
키요시는 손을 내젓다 말고 갑작스레 울리는 핸드폰을 집어 전화를 받았다. 그들도 아직 작전을 시작하지는 않은 모양이라, 주고받는 대화에 별다른 위기감은 섞여있지 않다.
[모든 게 끝나면 오후 네 시 정도 될 거 같은데. 거긴?]
“여기도 그럴 거 같네요. 시작 시간이 느린 것 치고는 빨리 끝날 것 같아서 다행이라 해야 되나…….”
[거긴 무라사키바라가 다 쓸면 끝나잖냐! 여긴 신경 써야 할 게 두 배로 늘어서 성가시다고.]
“생포하는 일까지 같이 하셔야 했던가요?”
카사마츠가 그렇다며 투덜댔다. 그 후로도 잡담을 빙자한 투덜거림(주로 키세의 돌발행동에 관한 일들이었다)이 조금 더 이어지다, 일을 끝내고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는 것을 끝으로 통화를 끊었다. 키요시는 장소와 시간을 적은 지도 한 귀퉁이를 찢어 주머니에 넣은 뒤, 그제야 무라사키바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다리느라 지루해 죽는 줄 알았어.”
“미안, 이렇게 길어질 줄은 나도 미처 몰랐는걸. 키세가 카사마츠 씨를 많이 곤란하게 하나봐. 그 얘기를 들어주느라.”
“그런 건 그냥 돌아가서 들어도 되구. 일이 더 중요하잖아. 준비 못해서 내가 죽으면 키요시가 책임질 거구?”
키요시는 그럴 리가 없지 않겠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라사키바라, 내가 알려줬던 세 가지 기억하고 있어? 대화의 흐름을 벗어나는 질문에 의체의 표정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의체의 대답은 조금의 간격을 두고 돌아왔다. 그런 걸 잊어버릴 만큼 바보는 아니구. 안심이라는 듯 그는 웃었다.
“기억하고 있다 했으니 세 가지 모두 말해봐.”
“……그거 키요시가 정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말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걸.”
“내가 옳다고 생각했으니까. 다른 이유는 없어.”
무라사키바라. 키요시가 짐짓 엄한 어조로 의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의체는 불만이 가득 들어찬 얼굴로 키요시가 말해주었던 것을 순서대로 나열했다.
“한 번에 죽이라고 했구, 고통은 주지 말라고 했나…? 어차피 같은 말인데 왜 나눠둔 건지 모르겠어. 이거 정했다는 그 사람, 머리 나쁜 거 아니야?”
키요시는 시간을 확인했다. 나가야 할 시간까지 아직 조금 더 남았다. 이 대화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무기의 점검을 한 번 더 하고 나면 시간이 얼추 맞을 것이다. 무라사키바라, 마지막을 아직 말 안 했잖아. 그러자 작게 칫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키요시가 죽을 거 같으면 키요시……,”
어김없이 말이 막혔다. 그는 무라사키바라가 지금보다 더한 불쾌감을 느끼기 전에 재빠르게 그 말을 이어 받았다.
“나를 두고 도망치라고 했었지. 좋아, 모두 기억하고 있네.”
“그럴 거면 왜 나한테 말하라고 한 거야?”
구역질 나. 무라사키바라는 그렇게 말하며 목 아래의 가슴께를 힘주어 꾹 눌렀다. 조건강화가 의체로 하여금 그런 것들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키요시는 아주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웃음 아래로 그러한 감정을 감췄다.
내가 죽더라도 너는 죽을 일이 없을 거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 그러자 의체가 다시금 볼멘소리를 했다. 그것들을 대강 듣고 넘겨버린 뒤 키요시는 시계를 보았다. 5분이 남았다. 아직 하지 못한 말이 하나 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위의 지도를 접으며 입을 삐죽대는 무라사키바라에게 말했다.
“가장 중요한 말을 못 할 뻔 했네. 무라사키바라, 오늘 일은 전적으로 네게 맡긴다.”
“키요시, 설마 죽을까봐 발 빼는 거구?”
“오늘은 내가 서포트만 해줘도 충분해서 그래. 그리고 이즈키가 네 전투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했었거든. 기술관이 필요하다는데, 어쩌겠어.”
“……귀찮은데. 키요시가 부탁한다고 하면 들어줄게.”
키요시는 순순히 부탁하노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무라사키바라는 한층 더 험악한 기운을 내뿜었지만 그 뿐이었다.
그리고 식탁 앞을 벗어나 자신의 무기를 챙기는 무라사키바라의 등에 대고 그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뭔지만 기억하고 있으라는 말을 덧붙이듯 했다. 무라사키바라에게선 더 이상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키요시는 의체가 무사히, 혹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일을 잘 끝내고 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담당하고 있는 의체―무라사키바라는 그런 존재였으니 말이다.
눈앞으로 간밤의 잔상이 스치듯 지나갔다. 이곳에서는 들릴 리가 없는 소리들도 귓전에 요란스레 울렸다. 키요시는 조금 축축해진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제 그에게 여분의 약은 아까 먹었던 것을 제외하면 딱 한 회분만이 남았다. 마지막의 약은 카사마츠 씨 일행을 만난 뒤에 먹으면, 공사로 돌아갈 때까지는 괜찮을 것이다. 그 때까지만 버티자.
키요시는 그 몫의 짐을 챙겨 짧은 기간 동안 묵었던 숙소를 나섰다. 그리고 품 안에 총을 숨긴 무라사키바라가 키요시의 뒤를 따랐다.
덧붙임
제일 첫 문장인 <키요시 텟페이는 잘 시간이 되면 항상 안대를 찾았다. 그의 안대는 검은색으로, 그가 안대를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색이 바뀌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가 쓰고 싶어서 시작한 연성인데, 왜 이렇게 쭉쭉 늘어나는지는 ◑ㅅ◑
이즈키는 키요시 측, 그러니까 무라사키바라를 담당하는 기술관입니다. 써놓고 나니 엔지니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지 않나 싶었는데 이미 전에도 기술관이라 써버려서… (mm )
다음이 중편이 될지 하편이 될지는 모르겠네요. 짧으면 상/하로, 좀 더 길어지면 상/중/하로 끝날거라 생각합니다. 끝나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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