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결 이후 네타 주의
단 한 번의 사고였다고 했다.
의료진은 그들보다 큰, 그러나 침대에 누워 있어 눈높이가 낮은 환자를 보며 그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연신 이러저러한 말을 해댔다. 그리고 말이 이어질수록 통역을 위해 옆에 함께 있던 알렉스의 표정이 말로는 다 할 수 없을 만큼 험악하게 변해갔다. 알렉스, 왜 그러냐는 뜻을 담아 그녀를 부르면 슬픔이 반쯤 섞인 눈길이 그에게로 툭 떨어졌다.
그 직후 알렉스는 의료진에게 엄청나게 화를 냈다. 물론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키요시는 그러한 광경을 모두 눈에 담으며 링겔 바늘이 꽂혀있지 않은 손으로 다리 부근을 매만졌다. 큰 손이 이불 위를 오갔다. 그런데 정말로 이상하게도 다리 부근에서는 손바닥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 조금은 얼빠진 얼굴로 다시 다리를 만졌다. 이번에는 오른쪽을 먼저. 여기는 평소와 같다. 이불도, 손도, 다리도, 모두. 하지만 왼쪽은.
분명히 다리는 있는데, 그 뿐이었다. 굳이 따지자고 한다면 나무토막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하는 게 가장 옳지 않을까. 키요시 텟페이는 다시금 알렉스를 보았다. 수술, 끝났어요? 긴장한 탓인지 조금 어눌해진 일본어가 입에서 마구잡이로 튀어나갔다. 그때껏 의료진과 입씨름을 하고 있던 알렉스는 분명 자신의 말을 들었음에도 아무런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
“…미안해, 키요시. 수술은……,”
알렉스가 의료진을 한 번 흘끗댔다. 그들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미안함을 표시하려는 지 모두들 표정이 꽤나 나빴다. 키요시는 알렉스와 그들을 번갈아 보다, 어디서부터 올라오는 것인지 모를 기묘한 불안감에 손아래에 있던 이불을 세게 쥐었다. 지금 느끼는 이게 부디 현실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스스로에게 괜찮을 것이라 위로하듯, 아주 희미한 웃음이 키요시 텟페이의 입술 위를 차츰차츰 덧씌웠다.
한참이나 망설이던 알렉스가 말을 끝낸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오래도록 기다리게 한 것 치고 그 말은 짧았으나, 그것이 품고 있는 무게는 상상 이상으로 무거웠다.
“실패했어.”
* * *
3학년의 여름, 인터하이가 끝났다. 세이린은 전국대회에는 진출했지만 우승하지는 못했다. 이유를 꼽자면 당장 생각나는 것이 몇 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컸을 이유는 역시나 센터의 부재다. 미토베가 키요시의 자리를 이어받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어도 한계는 있었다. 그래서 졌다. 그 때만큼 키요시 텟페이가 떠올랐던 적은 없었다.
대기 전체에 눅진하게 퍼져있는 습기가 몸 위로 엉겨 붙는 장마철에도 연습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길게 이어졌다. 그래서였다. 평소라면 재깍 받았을 키요시 텟페이의 전화를 받지 못한 이유 말이다. 휴가 쥰페이는 연습 직후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에야 핸드폰에 떠 있는 부재중 연락 하나를 발견했다.
이름을 확인한 뒤에는 자연스럽게 전화를 걸었다. 걸고 난 뒤에야 국제전화 비용 비싸지 않던가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봐도 될 일이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키요시 쪽에서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은 거의 없었던 탓이다. 그런 녀석에게서 먼저 전화가 왔다. 무슨 중요한 말이라도 하려던게 틀림이 없었을 텐데, 그런 전화를 받지 못했다. 쓸데없이 밀려오는 죄책감에 표정을 구기며, 그는 얼른 상대가 전화를 받길 기다렸다.
통화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다. 끊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전화해 볼까. 한 쪽 어깨와 귀 사이로 핸드폰을 끼운 뒤 엉성하게 바지를 꿰어 입으며 그는 미국과 일본의 시차를 가늠했다. 자고 있어서 못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다 연결음이 뚝 끊어졌다. 여보세요. 휴가는 웃옷을 입다 말고 어정쩡한 자세로 핸드폰을 들어 귀에 바로 댔다.
“난데, 전화 왜 했어.”
[휴가?]
누가 건 전화인지 확인하고 받았을 것인데도, 되묻는 말에는 얼빠짐이 섞여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어쩐지 눈가가 조금 찌푸려진다. 그는 구겨지려 하는 미간을 엄지로 꾹꾹 누르며 이어지는 키요시의 말을 들었다.
[지금쯤이면 연습 끝났을 시간이려나?]
“이제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어. 그러는 너는, 거기 지금 밤인가 새벽인가 그렇지 않았냐.”
[어―, 지금은 미국 아냐. 일본에 왔어.]
“뭐?”
한숨에 뒤이어 놀람과 짜증이 뒤섞인 말이 정리되지 않고 마구잡이로 나왔다. 치료 끝났으면 연락하라고 했던 건 귓등으로 들어 처먹었냐! 덕분에 아직 탈의실에 남아 옷을 갈아입고 있던 다른 부원들의 시선이 전부 휴가에게로 모아졌다.
“휴가, 키요시야? 일본에 왔대?”
“키요시가 돌아왔다고?”
“키요시 선배가 돌아왔어? 입니다.”
“방금 전에 하신 말로 보자면 그래 보입니다, 카가미 군.”
탈의실이 금세 시끄러워졌다. 하지만 전화를 하는 데에 문제가 갈 정도는 아니라서 휴가는 계속해서 통화를 이어갔다. 몇 번 이어진 대화의 결론은 결국 잠시 후 만나자는 것이었다. 휴가는 약속장소와 시간을 정한 뒤 종료 버튼을 눌렀다. 등 뒤로는 부윈들의 시선이 콕콕 박히고 있다. 이거 뭐라 말을 해줘야 하나. 머리를 벅벅 긁던 휴가는 곧 몸을 돌려 키요시 텟페이, 그들의 골밑을 지켜주던 이의 말을 전해주었다.
낮의 더위는 밤이 되어도 가실 줄을 몰랐다. 그러고 보면 요즘 들어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던가 하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여름은 이래서 싫다니까. 짜증을 섞어 투덜대며 그는 홀로 약속장소로 향했다. 농구부원들과 리코와는 조금 전에 헤어진 참이다. 그 놈이 너네랑은 날 잡아서 만나고 싶단다. 따라오려는 녀석들은 저 말로 물리쳐냈다. 실제로 키요시가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지만, 나중에 그렇게 하라고 하면 되는 거다.
만나기로 한 곳은 집에 가는 길 부근에 있는 야외 농구 코트다. 다 나아 와서 1 on 1이라도 하자고 그러려고 하나. 별 실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둥둥 떠돌았다. 농구 코트가 가까워지자, 휴가는 철망 너머로 보이는 코트에 누군가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아직은 잘 알아볼 수 없는 인영이 하나 있다.
“멍청하게 서서 뭐하냐―, 키요시!”
코트에 빠르게 다가가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골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몸이 반 바퀴를 빙글 돌았다. 미국에 가기 전보다 조금 더 덥수룩해진 머리와 얼핏 보면 나사 빠진 것 마냥 보이는 얼굴. 키요시 텟페이다. 휴가는 아직 잠기지 않은 철문을 열고 코트 안으로 들어갔다.
“왔네, 휴가. 오랜만이야.”
“오랜만이고 뭐고, 너는 내가 올 때 뭐부터 하라고…… 가뜩이나 연락도 없는 놈이―, 후, 아니, 됐다.”
좁아진 미간을 누르며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긴 휴가가 다시 말했다. 이제 완전히 돌아온 거냐? 담백한 긍정이 뒤따랐다. 재활은. 미묘한 미소가 입술 위에 머물렀다.
“천천히 하면 된대.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렇게 말하고 또 무리할 거 다 안다.”
“하하… 너무 믿음을 못 줬나?”
키요시가 머쓱하게 웃었다. 휴가는 한동안 그 모습을 더 지켜보고 있다, 한 쪽 허리에 손을 올리며 삐딱하게 섰다. 할 말은 그걸로 끝? 응, 끝이야. 그 대답을 들은 순간, 휴가 쥰페이는 이마에 핏줄이 서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저 놈이 다치지만 않았으면 한 대 패기라도 했을 텐데! 그는 주먹을 정확히 세 번 쥐었다 폈다.
하고 싶은 말은 정말로 목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많았어도, 일단은.
“잘 왔어.”
딱 이 하나만 하기로 했다. 보고 싶었다느니, 어떻게 지냈냐느니, 그런 간지러운 말을 할 수 있을 리도 없거니와 오늘 이 자리에서는 할 생각도 없다. 키요시가 먼저 보고 싶었다고 말했더라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키요시는 그 말에 그저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수술이 실패했다는 말도, 다시는 농구를 할 수 없다는 말도, 그 또한 휴가 쥰페이와 마찬가지로 해야 할 말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그 말들이 그를 보자마자 모두 짜기라도 한 것 마냥 속으로 꾹꾹 들어가 버려 나오질 않았다.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거짓말을 한 셈이 되었다.
수술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키요시가 알렉스에게 가장 먼저 부탁한 것은 일본의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카가미와 히무로 타츠야, 둘 모두에게. 좋은 소식이라면 단번에 알렸겠지만, 나쁜 소식을 굳이 알릴 이유가 있느냐는게 알렉스를 설득할 때의 이유였다. 제가 직접 가서 말할게요. 그 때에도 키요시는 울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에야,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휴가 앞에서 눈물이 나오진 말았으면 하는데. 그는 바닥에 대충 놓은 가방을 챙겨 먼저 문 쪽으로 걸어가는 휴가의 뒷모습에 눈길을 주다, 안 가냐며 묻는 말에 반사적으로 간다고 대답했다. 대답을 아주 조금 늦게 했을 뿐인데, 그 사이에 이상을 감지한 것인지 휴가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할 말 남았어?”
“휴가.”
“왜.”
나 더 이상 농구를 못하게 됐어.
―라고, 말해야 하는데.
고요한 안경 너머의 눈을 보자마자 그 말들은 다시금 목구멍 뒤로 넘어가 버렸다. 분명 나중에 들으면 짜증내거나, 화를 내거나, 그럴 텐데. 미안, 휴가. 다음에 말해줄게. 키요시 텟페이는 언제나처럼, 휴가 쥰페이가 기억하는 모습대로 웃으며 원래 하려던 말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이걸 안 말했던 거 같아서. 보고 싶었어.”
결국 옆구리를 한 대 얻어맞았다.
지금은 이걸로 됐다. 다음에 만나면 그 때, 반드시 얘기하자.
덧붙임
이 글의 휴가와 키요시는 서로 고백도 했고 마음 확인도 했는데, 그냥 둘 모두가 연인 사이의 그것들을 간질간질하다고 생각해서 사귀기 전이나 후나 별반 다를게 없는 쪽입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좀 더 표현하는 쪽은 키요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남고딩 둘이서 사귀는 거니까요. 이래저래 사귀면서 많은 변화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첫 글부터 미래를 꿈과 희망도 없이 만들어버린 선배에게… 많이 미안해… 선배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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